이사를 했다. 지난 회사는 집에서 꽤 멀었다. 걷고 지하철을 탔다가, 다시 내려 회사까지 걷는 시간까지 합하면 약 1시간 가량 걸리는 거리였다. 출퇴근 시간에 서울의 지하철을 탄다는 것은 재앙에 가깝다. 출근 시간에는 어찌어찌 버틴다 치더라도, 내 몸에서 에너지라는 것이 다 빠져나가 버린 퇴근 시간에는,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뚜렷하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래서 새 회사는 ‘무조건 걸어가자!’라는 기준 아래에 집을 고르기 시작했다. 첫 부동산에서 꽤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했다. 곧장 계약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집에 들어왔다.

요즘 무척 끌리던 그레이 톤 철제 벽에, 거대한 이중 창, 그리고 그 이중 창 덕분에 외풍이 없어서 춥지 않았다. 좁은 공간이기는 해도 알찬 구성이었다. 처음에는 내 마음대로 방을 꾸밀 생각에 ‘뭐부터 사지?’라는 생각이 가득했었다. 고작 일주일이 지난 지금, 내게 주어진 지상 최대의 과제는 ‘이 집을 떠나는 것’이 되었다.






문제의 그 벽 – 출처 내 폰





멋지다고 생각한 그레이 톤의 철제 벽이, 방음이라는 역할을 전혀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옆집 사람의 행태에 있다.

(그녀는 아니다. 굵은 목소리였다. 그것도 꽤나 듣기 싫은.)는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른다. 나는 ‘가수인가?’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으나, 그의 노래를 귀 기울여 들은 후로는 잠깐이라도 그 생각을 했던 내 머리를 탁! 치고 말았다.


노랫소리만 들린다면 또 모르겠으나 사소한 기침 소리, 크게 말하는 말소리마저 다 들린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나도 가끔 기침을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머리를 말리는데 그에게도 들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윤수일의 아파트를 부르고 있다. 연령대나 취향이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옆집 사람이 만약 잠시 노래를 부르지 않는 순간에 다른 집의 소리를 듣고, ‘내가 노래를 부르는 게 저 집에도 다 들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내가 이토록 짜증을 내는 상황이 왔을까.

사실 이 같은 불편함의 문제는 상대방 입장에 대한 고려가 결여 되어있기 때문이다. 만약 다툼이 발생하더라도 상대방이 그토록 불평을 늘어놓는 이유를 먼저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쉽게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늘 싸움이 커지는 데에는 ‘나’가 더 중요하다는 데 무게 추를 두고 움직일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무게 추를 조금만 옮겨 보면, 사실 모두의 거리는 가깝다





‘나’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무게 추를 조금만 옮겨 보자는 것이다.

예전에 다른 글에서 양보와 인정의 문제를 다룬 적이 있다. 고백하면, 사실 내가 제기하는 모든 사회적 문제는 다시 한 번 양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이유는 다른 게 없다.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고려를 조금이라도 늘리는 순간, 세상은 많이 바뀔 것임에 틀림없다.


서점에 가면 자기계발서가 참 많다. 다들 판매 순위에서도 상위권에 속해 있다. 자기계발서가 아니면, 위로를 위시한 ‘힐링북’들일 것이다.


서점의 베스트 순위만 봐도, 이 세상이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나도 회사에 쓰는 50 문답 난에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인생이며 잃고 싶지 않은 것도 내 인생이다’라고 썼지만, 내 인생이 잘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은 타인들의 힘도 있는 것이다.


이제는 옆집에서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방음 수준이 얼마나 처참한지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나도 EDM(Electronic Dance Music)을 크게 틀어 놨었다. 깨달은 건지 음악이 질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전자였으면 좋겠다.




글. 성문경. 조용히 좀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