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못하는 건 없다 한다. 일단 시작하면 길은 보인다고. 이 악물고 덤비면 안 되는 게 없다고. 더구나 젊음이란 가능성으로 부푸는 풍선 같아서 얼마든지 떠오를 수 있다고. 높게 높게.


그런데 막상 해보면 무엇이던 다 되는 건 아니더라.

나의 가능성이란 단지 고만한 울타리 안에서 고만큼 자라는 게 최선일뿐.


벼룩의 점프력은 상당하다. 방바닥에 놓으면 천정까지 닿을 정도. 그런데 이 벼룩에게 작은 유리잔을 하나 씌워놓으면 벼룩은 몇 번 뛰어보다 어차피 유리잔의 높이만큼이 한계라고 생각해서 그만큼만 뛰어 오른다. 이후 유리잔을 치워도 벼룩은 계속 잔의 높이만큼만 점프한다.


(C)swing in flicr


한계란 그런 것이다. 투명하지만 분명히 가로막고 있는 막

결코 스스로의 힘으론 깰 수 없는 유리잔이 우리에게도 씌워져 있다. 그 속에서 아무리 뛰어봤자 결국 유리잔만큼일 뿐. 부수고 나갈 도리가 없다. 우리가 이루려는 모든 것들은 사실 이미 유리잔만큼의 꿈들이다. 유리잔 밖의 세계를 감당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 작은 소망조차 이루기가 버거워 이렇게 헐떡이며 살아간다. 세상에 될 수 있는 무엇이란 게 일억 가지 정도 있다고 가정하면 우리에게 가능한 선택은 고작 열 가지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하는 건 현재부터 가능한 꿈들이다. 지금부터 노력해서 될 수 있는 것들이 새로운 목표가 된다. 우리는 어릴 적 참 커다란 꿈들을 꾸는데 나이가 들며 그것들은 소리 없이 사라진다. 유년의 우리는 대통령이 되고 싶었고 지구를 지키는 파워레인저가 되고자 했다. 무엇이던 될 수 있다면 허황된 꿈이란 말조차 존재하지 않아야 마땅한 것을. 어릴 적 꿈들이 사라지는 건 이젠 철이 들었기 때문도 아니고 비로소 진정한 꿈을 찾았기 때문도 아니다.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무엇이던 될 수 없다는 것을.

막상 꿈이란 게 구체적이어야 할 나이가 됐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고작 사지선다의 범위쯤. 그래서 꿈도 결국엔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 현재 나의 세대가 가진 꿈은 무엇인가?


어릴 적 친구 중 직장인이 꿈이라던 녀석이 있었다. 어릴 땐 그래도 제법 거창한 꿈들 꾸기 마련이어서 각자 꿈을 말하다 보면 한 반 친구들만으로도 지구를 움직이겠다, 싶을 만큼 꿈들은 다양했고 그 중 ‘안정된 직장인’ 같은 건 가장 초라한 소망이었다. 꿈 축에는 끼워주지도 않던.


그런데 10년 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꿈들은 학살당하고 살아 남은 건 오로지 그 친구의 꿈뿐이다.


직장인이 되겠다던 그 꿈. 어른이 된 우리는 이제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한다. 취직해야죠.


(C)tvN 미생 드라마 중 캡쳐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씌워진 유리잔이다. 어쩌면 사회에 귀속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유리잔을 덮는 것과 같다. 순응하는 법을 알아가고 가능한 경우를 모색한다. 무엇이던 될 수 있기를 바라기 보다 무엇이라도 되어 보기 위해 점프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유리잔의 딱딱한 바닥에 부딪혀 튕겨 나올 뿐 깨고 나가지 못한다. 이내 터득하는 건 잔 속의 최대치만큼 뛰는 요령. 다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의 높이로 뛰어 오르는 것. 그만큼의 가능성만을 우리는 가질 수 있다.


젊다는 건 부딪힘을 아직 견딜 수 있을 만할 때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꾸만 나가 떨어지는 때. 그래도 한 번 더 뛰어볼 요량을 간직한, 너무도 무모한 때.


젊다는 건 단지 그 뿐.
젊다는 건 단지 그 뿐.


잔은 부수어지지 않는다. 젊은 날의 객기란 그럼에도 부딪히는 울분의 표출이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 더 이상 부딪히려 들지 않는다. 뛸 수 있는 만큼만 뛰는 것이 곧 안정이라는 것을 깨닫고 각자의 높이에 익숙해진다. 그 높이를 찾기 위해 젊은 우리는 할 수 없이 뛰는 것이다. 모든 기력이 쇠진할 때까지. 각자의 높이를 알게 될 때까지.


그런데 그 마저도 결코 쉽지 않다. 부딪힐수록 자꾸만 멍이 든다.



글. 안창용. 프리터, 멍드는 중.